경술국치, 역사를 되새겨야하는 이유 > 함안뉴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발행인칼럼 경술국치, 역사를 되새겨야하는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일 2022-08-31 20:19

본문

경술국치, 역사를 되새겨야하는 이유


e102d823cd90f48b255133b743395a86_1661944783_1307.jpg


인류최대의 살육전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20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사자만 1000만명 넘었고, 민간 사망자도 600만명이 넘었다. 부상자도 수천 만 명에 달했다.


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은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전쟁에 대한 가공할 공포는 열강들에게 더 이상의 1차 대전과 같은 재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1920년 국제연맹(國際聯盟)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불과 20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욱 끔찍한 살육전이 다시 반복됐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는 5,646만 명에 달한다. 


어리석을 정도로 끔찍한 살육전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도화된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화 되어 식민지 시장 확보를 위해 팽창하면서 제국주의 국가 간 발생한 전쟁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더욱 본질적으로 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이해나 욕망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개인이 집단화된 국가든 마찬가지다. 개인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국가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한다.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문명이 발생한 이래 약간의 방법만 다를 뿐 결국 반복하는 것이다. 


1910년 8월 29일은 나라를 잃은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이다. 이날은 일제가 대한제국으로부터 ‘통치권을 일본에게 양여(讓與)’하도록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날이다.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합병조약을 통과시켰으며, 8월 29일 이 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써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완전히 나라를 강탈당했으며, 본격적인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나라를 잃은 그날이 조선 백성들에는 치욕의 망국일이었지만 일제에 부역한 이들에게는 부귀영화가 시작된 날이었다.


앞서 1876년(고종 13년) 2월 일제는 군사력을 동원해 강화도에서 강압적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이미 식민지 계획에 착수했다.


이어 1905년 1월 1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이 개통됐다. 다음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도 1906년 4월 개통됐다. 일본은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우겼지만, 조선침탈과 대륙침략을 위한 준비단계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단 철도망이 확보되자 일제는 1905년 7월부터 경제의 상징인 돈을 일본 화폐로 바꾸는 ‘메가타의 화폐정리’를 시행했다.


일제의 재정고문인 메가타는 ‘화폐정리 사업’라는 명목으로 직접적으로 대한제국의 재산을 강탈해 갔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화폐 재산을 강탈당하고 상인들은 몰락했다.


이어 토지확보를 위한 동양척식 주식회사를 세웠다.


조선의 조정간섭을 위한 1904년 1차 한일협약의 체결에서부터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기까지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8월 29일 일본의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공포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말과 글, 심지어 이름까지 죄다 바꾸는 민족혼의 말살이 시작됐다. 


일제로부터 2등 국민으로 살기를 강요당하며 나라뿐 아니라 민족까지 사라지게 됐다. 함께 수탈도 시작됐다.


이미 조선은 1592년 4월 왜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유린된 바 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도 무방비 상태로 다시 나라를 다시 뺏긴 것이다.


특히, 왜군은 1597년 9월 공을 인정받기 위해서 조선인 2만 명의 머리 대신 귀와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 뒤 상자에 넣어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은 귀무덤,코무덤 <이비총(耳鼻塚)>을 만들어 1968년 4월 12일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 역사는 다시 반복됐다.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을 수탈했다. 일제에 부역한자는 호의호식한 반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몸을 바친 독립 운동가들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다.


 독립 운동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조차 없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후손들은 해방이후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하지만 지금의 친일 부역자들의 후손들은 일제가 조선의 발전을 앞 당겼다고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이웃나라 운운하며 지난 일은 잊고 미래를 위한 한·일간의 우호관계를 논한다.


한국에 뿌리깊이 자리한 친일의 기득권이 호의호식하며 당당하게 억지 주장을 하는 한, 또 한 번 역사가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일본은 지난 행위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며 점점 우경화되어 가며 평화헌법을 끊임없이 수정하려 시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국제관계는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양육강식 그 자체다.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갖자는 것은 아니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역사는 짧은 단위로 보면 달라 보이지만, 큰 줄기로 보면 신기하리만큼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이 과거와 현대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이어진다. 역사를 되새겨야하는 이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 대게 성공보다 실패에서 많은 교훈을 얻는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광복절보다 더욱 되새기고 기억해야할 날이 8월 29일 경술국치일일지도 모른다.







함안뉴스 (hamannews@naver.com)
저작권자(c) 함안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전체

함안뉴스 목록
게시물 검색


  • (주)함안뉴스   등록번호:경남 다 0137   대표이사 발행인:조용찬   편집인 편집국장:손성경
  • 주소:경남 함안군 가야읍 중앙남3길 30   전화:055-584-0033~4   팩스:055-584-0035   이메일:hamannews@naver.com
  • 함안뉴스의 모든 콘텐츠를 무단 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 Copyright by haman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