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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연현은 광복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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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9-0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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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현은 광복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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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문인협회 회장 조평래


이순일 선생께서 지면을 통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혀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면서 반론한다.


1. 저서


조연현은 61세까지 살면서 <조연현 문학전집 6권>, 단행본 33권, 월평과 단평을 합쳐 400 편 이상의 글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23세 혈기왕성한 청년시절 <동양에의 향수>, <아세아부흥론 서설> 2편의 글에서 동양문화의 우수성을 말하면서 미국과 영국의 약육강식 문화를 비판하였다하여 민족반역자와 동급으로 매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이 글을 쓴 시기는 면서기 직전 학생운동으로 요시찰 인물이 되어 일제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만주와 절 등에서 도피 생활 중에 쓴 것으로 정정한다.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거나 고문하고 죽인 자, 나라를 팔아먹고 은사금을 받은 자 등 민족반역자는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되며,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여 억울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본다. 끔직한 사건이 발생하면 검사와 판사가 긴 시간을 가지고 한 사건을 깊이 살펴보아도 오판으로 혐의가 없는 사람을 사형시키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동국대 국문과 출신과 서라벌예대 문창과 출신들이 문단을 장악하다시피 했을 때 그 중심에 순수문학의 상징 조연현이 있었고, 이를 쓰러뜨리고 극복해야 하는 불만 세력들이 있었다.


주로 S대 국문과 출신과 실천문학 쪽 문인들이 가장 약효와 파급력이 강한 친일과 독재(파시스트)를 무기로 상대의 심장에 치명상을 입히고자 했음은 문단에 퍼져있던 이야기가 아닌가?


필자도 개인적 취향은 실천문학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매장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2. 창씨개명


조연현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것이 창씨개명인데, 당시 일본 유학생과 학교에 다닌 사람은 모두 친일파란 말인가?


창씨개명을 안 하며 1940년부터 입학과 취직을 못하게 제도적으로 막아 광복직전 창씨개명을 피할 방법은 자결하거나, 국외로 탈출하거나, 승려가 되는 방법 외는 길이 없었다.


조연현은 이런 문제로 학창시절 일제에 저항하다 3번을 퇴학당했고, 만주와 절에서 도피하다 살아남기 위해 덕전연현(德田演鉉)으로 창씨개명을 한 후 면서기가 되었다.


아래에서 말할 구소현은 동경유학을 위해 천곡일실(川谷一實)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참고로 시인 윤동주는 1941년 히라누마(平沼)로 창씨개명하고 1942년 도코릿코대학에 입학한다. 창씨개명을 하였다 하여 모두 부역자들이란 말인가?


3. 구소현의 만남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주체 할 수 없는 감격이었지만, 일제 앞잡이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조연현은 광복을 어떻게 맞이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연현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가 감격의 기쁨을 함께 한 사람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구소현이었다.


(<조연현 문학전집 1권, 151~2쪽>). 그렇다면 구소현(具小鉉)은 어떤 사람일까?


조연현 보다 4살 위로 일본 중앙대학에서 법학과 명치대학에서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조연현이 면서기를 할 시기 병보석으로 풀려 고향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구소현은 1943년 8월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연맹이 조직 될 때 27세에 참여한 여운형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가장 젊은 청년이었으며, 여운형이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1944년 8월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건국동맹으로 확대개편 할 때 주요인물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이 시기에 조연현을 만나게 된다. 조연현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 했다.


“......두 사람은 밤마다 토론과 설전을 벌렸다. 구씨와 나의 사상적․ 정치적 견해는 일치 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일치 되는 것은 서로의 인격과 애국심을 믿는 일이었다. ...... 어느 날 해방이 왔다. 구씨와 나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지만, 우리 두 사람이 걷는 길은 그 순간부터 서로 달랐다”


만약 구소현이 조연현을 일제의 앞잡이로 생각했다면, 위험한 처지에 있던 구소현이 일제의 앞잡이에게 속내를 다 보여 주었을까?


구소현은 일가족 5명이 한국전쟁 때 전몰되었으나 사회주의자였기에 함부로 관심을 가지거나 말할 수 없었고, 조연현은 엉뚱하게 친일로 몰려 고향에서 생매장 받을 처지에 놓여 있다.


고향에서 인물 대접을동경 유학시절 구소현, 몽양 여운형이 아꼈던 젊은 인재. 이런 식으로 해도 된다 말인가?


4. 함안면 청년대표


광복이 되자마자 함안면에 죽창사건이 일어나 여러 사람이 죽창에 희생되었고, ‘자고나면 죽창사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군북면 출신으로 역사학자 이만열도 광복직후 군북면의 분위기를 증언하면서 일제의 앞잡이와 동장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군민이 모여 자치위원회를 만들 때 조연현은 봉성동 대표로 추대된 후 함안면 청년대표가 되어 청년들과 함께 함안군청을 접수하려 들어간다.


조연현이 일제 앞장이었다면 함안면의 청년대표가 가능했을까? 당시 함안군수는 경북 경주출신으로 안용대였으며 청년들과 군수 간에 고성과 욕설이 오고가고 군수 폭행이 일어나기도 했다.


분위기 험악해지자 큰 사고가 일어 날 것을 염려하여 조연현이 중재자로 나서 더 이상의 불상사를 막기도 한다.


5. 문단의 수장


서울로 자리를 옮긴 조연현은 신문사 기자, 대학교수, <현대문학> 주간 등을 하다 1973년 53세 때 대한민국 문인들의 수장을 뽑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 출마한다.


어느 선거보다 치열해 신상이 다 털리는 선거였지만 조연현은 어렵지 않게 당선되는데, 일제 앞잡이였다면 당선이 가능했을까?


이 보다 앞선 예술원 회원 선거에서 조연현은 최연소 회원이 되었지만, 이 선거에 당선되고도 친일문제로 제명된 원로들이 있었음은 참고가 될 것이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직 연속 3번 당선을 피하기 위해 중간에 한 번 불출마를 하지만, 4번 출마하여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모두 당선 되었고 재직 중에 작고했다.


죽은 자에게도 인권이 있고 명예가 있는데 과대 포장하여 이렇게 짓밟아도 된다 말인가?


6. 이순일 선생께 회신


조연현의 수백편의 글 중에 23세 때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2편의 글에서 미국과 영국문화를 비판하였다 하여 친일파로 보는 것에 동의 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가족까지 끌고 와 상처를 주면서 사과해야 한다는 말은 논리상 성립되지 않는다고 본다.


문학상과 백일장을 말하면서 이태준, 정구 등을 나열 하였는데, 이 분들이 한글로 문학작품을 남긴 문학가들인지 묻고 싶다.


역으로 아무리 작품성이 빼어난 시나 (詩) 소설일지라도 의학학회지나 정치․행정학회지에 실어 달라고 하면 맞는 이야기일까?


그리고 춘천 사람들이 조연현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안다고 가볍게 시판를 세우고 가볍게 땅에 묻어 명예를 훼손시킨다 말인가? 함안군이 본받을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경남의 친일파 잔재 청산 조례 제정은 친일파 청산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며, 조연현에게 적용 될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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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유학시절 구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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